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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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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혁경 |
등록일시 |
200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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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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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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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청계천에 박수, 새만금엔? ...... 강맑실/조선일보 |
“비 갠 뒤의 숲길을 걷노라면 언제나처럼 딱새가 따라나선다. …그 녀석은 팔 뻗으면 닿을 거리를 날다가 바닥으로 내려가 먹음직한 파란 벌레 한 마리를 물고는 내 얼굴 높이의 나뭇가지에 앉아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새의 애정 표시로는 맛있는 벌레를 선물하는 것 이상은 없을 것이다.”
가나안 농원을 일구던 진보적 농군이자 원로 수필가인 장돈식이 쓴 산방일기 ‘빈산엔 노랑꽃’에 나오는 구절이다. 저자는 불치의 병을 앓던 아내를 데리고 무조건 치악산의 한 자락인 백운산으로 들어가 10년을 살았다. 그 언제일지 모르지만 저자가 홀연히 세상을 하직하는 날, 귀틀집 처마 끝에 8년째 깃들이고 있는 딱새 가족들은 물론 정을 붙였던 앞산의 소나무가 그를 기억해 주리라는 소망은 무너지고 만다. 고속도로가 나면서 귀틀집이 들어앉은 산과 그 앞산이 중장비에 의해 무참히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야생초 편지’를 비롯해 자연과 나눈 경이로운 소통의 체험을 담은 책들이 몇 년 전부터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헬렌과 스콧 니어링 부부의 버몬트 숲 속의 삶을 기록한 책들이나 티베트 라다크 사람들의 지혜로운 삶을 다룬 ‘오래된 미래’는 훨씬 이전부터 독자들이 많이 찾던 책들이다. 녹색평론사의 월간지 ‘녹색평론’이나 녹색연합의 월간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찾는 독자도 서서히 늘고 있다고 한다.
이 책들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단순히 물질문명의 속도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들을 느림의 미학으로 위로해주고자 하는 걸까. 아니면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이리 경이로우니 우리에게도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손짓하는 걸까. 이 책들의 핵심은 자연과 문명에 대한 우리들의 이중적 의식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점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의 교정을 촉구하고 있다.
산 속의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와 나눈 교감에 희열을 느끼면서도 산들을 파헤치고 고속도로에 터널을 뚫어 교통체증이 줄면 미소를 머금는다.
서울에 살기에 청계천 복원에는 박수를 보내면서 새만금 갯벌 살리기에는 시큰둥하다. 산업 폐기물 때문에 폐기물 처리 시설의 요구를 외치다가도 제3세계로 공장이 옮겨가면 슬그머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중성을 띠는 우리의 이런 이기심은 어디서 나온 걸까.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서구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 인간이 도구를 발명했을 때를 일컬어 서구인들은 서슴없이 ‘인간, 드디어 자연의 지배자로 우뚝 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가치관에 물든 우리는 풀 한 포기에 희열을 느끼는 순간조차도 자연을 나 개인의 행복 추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우리는 지금 자연과 문명의 관계에 대해 심각한 개념의 혼란을 겪고 있다. 심지어 ‘환경은 국가 경쟁력이다’라는 말에조차 환경에 대한 경제 전략적 사고가 숨어 있다. 자국의 환경을 위해 힘 없는 제3세계를 산업 폐기물 처리장으로 만드는 것이 환경 패권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앞서 언급한 책들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서구의 가치관에서 ‘인간과 자연이 합일한다’는 동양의 테제로 우리의 의식이 바뀌기를 촉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책들이 담고 있는 핵심 메시지다.
동양은 일찍이 인간을 소우주로 파악하고 대우주인 자연과의 합일을 문명의 본질로 여겨왔다. 이 문명은 자연을 경제적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고 융화하는 문명이다. 책을 읽고 나서 이처럼 잃어버린 문명에 대해 새롭게 눈뜨는 의식의 대전환을 맞았다면 글쓴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은 것이리라.
(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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