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飛行看山 旅行記-바르셀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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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윤혁경 | 등록일 : 2003-12-15
| 조회수 :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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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위대한 건축가가 한 도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을 바로셀로나에서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한 건축가가 그곳에서 태어난 것도 부러웠고, 또 그 건축가가 그의 창작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한 당시의 배경과 여건도 부러웠다. 과연 서울에 이름난 건축가는 누구인가? 서울의 이름을 걸고 보여 줄 수 있는 건축물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바로셀로나와 가우디는 좋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저녁 8시에 파리 드골공항을 출발해서 밤늦게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 호텔까지 족히 1시간 30분은 달린 것 같다. 한참을 달린 것 같아서 눈을 뜨면 지상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하도로만 달리는 기분이었다. 다음날 확인된 일인데 바르셀로나의 외곽 도로의 대부분이 일반 지반면보다 낮게 되어 있었다. 파리에서의 무리한 도보 관광과 비행기의 피로 때문에 우리 일행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곧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날 새벽, 새로운 도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찍 눈을 뜨게 되었다. 설램을 안고 창을 연 순간 한 폭의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평온한 풍경, 밀레의 농촌을 연상케 한 평화로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니 숙소는 바로셀로나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시내까지 대관령 같은 고개를 몇 고비 지나고, 숲과 계곡을 지나서 1시간은 족히 달려야 도착할 곳에 호텔을 잡은 것이었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다. 13~14세기에 조성된 항구도시다.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19세기에 신시가지를 새로 조성했다. 마치 바둑판처럼 격자형으로 조성되었는데 당시 교통수단인 마차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가각부분을 모로 접은 모습이 이채롭다. 재미있는 것은 도로 아래 부분은 모두 지하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년 전의 안목이 대단할 뿐이다.
건축물의 옛 모습을 보존하는 수준은 파리와 달리 상당부분 현대식 아파트로 변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언젠가는 우리나라처럼 옛 모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물론 석조 건축물의 특성상 쉽게 없어지지 않지만 도시의 경제 성장을 통해 새로운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서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물론 구시가지는 상대적으로 보다 엄격히 보존한다고 하나 그것마저도 문화재 보존을 위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주변의 개발압력이 언제 점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되었다.
가회동의 한옥을 보존해야 하는 어려움을 그들이 알지 모르겠다. 보존을 위한 일정한 지원책이 따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파리처럼 보다 엄격하게 현재의 모습을 유지시키고 옛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 바르셀로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본다.
스페인과 돈키호테, 스페인에는 3명의 돈키호테가 있다. 소설속의 돈키호테, 가우디, 그리고 프랑코이다. 이들 3인은 정상적인 시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엉뚱한 사람들이다. 이들 3인의 엉뚱함으로 스페인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1605년에 쓴 글이다. 당시 항간에 풍미했던 기사도 이야기를 풍자하기 위해 쓴 글이다. 돈키호테와 산초, 그리고 돈키호테의 명마(사실 말라빠진) 로씨난테와의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가우디 또한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꼭히 돈키호테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프랑코는 1892년도 에스파냐 갈리시아 엘페롤에서 출생했다. 군인의 길을 택한 그는 1921년 장군이 되고, 1931년 공화제가 수립되자 공화정부에 반대한 이유로 발레아레스섬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936년 10월 국민당 정부수반 및 군 총사령관이 되고, 그 후 2년 반에 걸친 에스파냐 내란에서 승리, 팔랑헤당의 1당 독재에 의한 파시즘 국가를 수립했다. 1966년 종신주석의 지위를 확립하고 1969년 국회에서 그가 죽거나 집정이 불가능해지면 부르봉가의 후안 왕자 카를로스가 왕위에 오를 것을 정하기도 했다. 그는 독재자로서 많은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 당시를 그래도 좋았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처럼 말이다.
2.1. 영웅으로 대접받는 건축가 가우디 스페인은 가우디, 미로, 피카소, 세르반테스의 거장들을 탄생시킨 나라이다. 바르셀로나 거리엔 가우디의 독특한 건축물이, 미로의 조각품이, 피카소의 이야기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동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우상이었다. 그의 동화 같은 건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야기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환상에 빠진다. 우리는 일정상 성가족 성당과 구엘공원, 바트로 주택 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다른 작품은 책과 사진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동료들은 왜 우리나라에는 가우디 같은 사람이 없느냐고, 반성해야 한다고 질책이다. 만약 가우디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과연 그처럼 훌륭한 건축물을 건축할 수 있었을까? 아마 건축법이나 규제제도 때문에 도저히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건축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창피했다.
가우디는 천재다. 그의 독창성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구조체나 외부 디테일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공장 제작이 불가능하고 모두 수작업으로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건축기간이나 비용 등이 몇 배나 더 들어간다는 점이다. 과연 우리나라에 그런 건축물을 건축한다고 한다면 어느 건축주가 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가우디가 만약 재정적인 후원자인 구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처럼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도 구엘처럼 문화를 이해하는 재벌들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한국의 구엘이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구엘은 대단히 존경스럽다.
안토니오 가우디(Gaudi y Cornet, Antounio)는 1852년 에스파냐 카탈루냐 레우스에서 태어난다. 어렸을 때 다리를 다친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곤충이나 식물 등 자연과 어울리며 생활했다. 그 과정에서 정밀 관찰한 것들이 나중에 건축디테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건축양식은 로마 건축양식과 고딕의 요소를 혼합한 아르누보 양식을 도입했다.
17세가 되는 1869년에 처음 바르셀로나 대학의 건축학과 예비과정에 입학을 하고, 1878년에 건축사를 취득하게 된다. 31세가 되는 1883년 그 유명한 성가족 성당의 총감독에 취임하면서 작품의 방향을 설정하게 되고, 1886년에 구엘궁전, 1891년 보띠네스 저택, 1898년 깔벳 저택, 1899년 구엘공원, 1903년 마르요까 성당, 1904년 그라네르 살라 메르세 저택, 호세 바뜨요 저택, 1906년 까사밀라 등 36개의 건축물이 있는데 그 중 17개의 작품은 스페인 정부가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고, 구엘궁전, 구엘공원, 까사밀라 저택은 1984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2.2.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 책에서만 보던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 앞에선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도저히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작품을 건축가가 만들 수 있었을까?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의 사상이나 철학은 무엇일까? 짧은 순간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많은 관광객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도 단체관광이라는 제약 때문에 외부만 둘러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아쉬운지, 혼자서라도 남아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大를 위한 小의 희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강림을 주제로 한 성가족 성당의 건축책임자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가우디가 선임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1883년 에 책임자로 선정되고, 1884년에 착공하여 지금까지 100년을 넘게 건축하고 있는데 아직 절반정도 밖에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앞으로 이 속도로 건축한다면 100년은 족히 더 걸릴 것이라고 하니 그 규모나 정교함이 어떠한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우디의 건축은 같은 부품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모두 수작업을 통해서 조각하듯이 건축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시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겠다는 것도 건축을 추진하는 ‘산 호세협회(가난한 신자들의 민간단체)’ 거절하고 철저하게 신도들의 헌금과 관광수입에 의존해서 건축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 성당이 지금까지 건축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교통사고로 죽은 1926년 6월까지 설계도면을 거의 완성시켜 두었기 때문이다.
2.3. 구엘 공원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뺄라다 언덕위에 구엘이 투자하고 가우디가 설계한 구엘공원은 당초 전원도시를 계획했다. 60여 채의 주택을 건축할 계획이었으나 도시로부터 떨어지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2채의 주택만 건축하고 나머지는 건축하지못한 미완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주택은 현재 시 정부가 구입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조성된 공원시설은 마치 동화의 세계에 온 것처럼 재미있고 호기심이 가득 찬 곳이었다. 자연주의 건축양식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모자이크 타일로 꾸민 야외 벤취, 천정화, 도마뱀, 탑신 등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현장에서 구한 작은 돌을 이용하여 기둥을 만들고 내부를 치장했는데 그 모양은 야자수 나무껍질과 닮았다. 가우디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는데 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카톨릭 집안에서 집시인 그 여인과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가우디 위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구엘 공원에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기둥 중 하나에 작은 돌들로 축조한 여인상이 그녀가 아니가 추측해보는 일도 가능하리라 본다.
2.4. 호세 바뜨요(Jose Batllo) 저택 바르셀로나의 그라시아 대로변에 위치한 호세 바뜨요(Jose Batllo) 저택은 마치 물고기의 아가미를 닮은, 호박귀신의 모습이, 각종 곤충의 뿔 모양의 모습들이 어울린 재미있는 외관이다. 호세 바뜨요로부터 보수공사를 의뢰받은 가우디는 그의 어린시절 보았던 비단벌레, 물고기, 귀신과 도깨비 등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표현한 작품이다. 1904년부터 1906년까지 3년이 걸렸으며, 1984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2.5. 구엘궁전(Palacio Guell)
구엘궁전은 Rambla 거리에 있는 구엘의 저택이다. 1886년에 지으진 것으로 지하 1층에는 마굿간이 있고, 위층의 중앙 홀은 아름다운 장식들로 꽉 차 있다. 이 건물은 가우디의 헌신에 의해 건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그는 성가족 성당의 건축책임자로 일하는 과정에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 건물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6. 까사밀라(Casa Mila) 주택 가우디가 마지막으로 만든 작품이다. 1906년부터 10년간 건축했는데, 당시 가우디는 시의 법령을 무시, 건축물 위 네 모퉁이에 성모마리아 상을 배치, 이를 싫어하는 건축주와 마찰을 일으켰다고 했다. 1911년 건축주 밀라가 1층과 현관에 회화적 장식을 요구하자 가우디는 건축 감독을 포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건물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7. 새벽 산책길에 발견한 공동묘지 바르셀로나의 새벽, 호텔 창문을 통해 그림처럼 다가온 풍경, 아름답게 펼쳐졌다. 호기심에 기웃거렸더니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혹시나하며 정문을 지나면서 이곳이 아파트형 공동묘지인 것을 알게 되었다. 관이 하나씩 들어갈 수 있도록 10여개 층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1m×1m 정도 공간을 사용하는데 각 공간마다 생존 시의 사진이나 가족들의 사랑이 담긴 글귀로 장시되어 있다.
어떤 곳에는 지난밤 누군가 새로운 꽃을 두고 간 것 같다. 이름모를 꽃에 애틋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매일 그대를 기억한다고,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라고....... 매년 여의도 면적만큼 묘지로 사라지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선 납골당처럼 이런 아파트형 공동묘지를 도입하는 것도 한번쯤 검토해 봄이 어떨지 모르겠다.
2.8. 걷고 싶은 거리(Rambla 거리) 피카소가 살았다는 집이 있고, 미로의 작품이 설치된 걷고 싶은 거리(Rambla 거리)는 또 다른 생명력을 갖고 있다. 가로변에 기념품을 파는 점포, 음식점, 꽃 가게 등이 들어서 손님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있었으며, 거리 군데군데 석고상처럼 서 있는 마임들을 만나게 되는데, 동전을 던져주면 기념사진을 한 장 찍을 수 있다.
북쪽의 카탈루냐 광장에서 남쪽 항구의 파우 광장까지 약 1km에 달하는 하천을 덮은 거리다. 이 거리를 따라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다양한 인종 전시장 같기도 하다. 그 자체가 재미있는 볼 꺼리다. 대학로와 명동을 복합한 모습이다.
2.9. 바르셀로나 항구 파우 광장에는 콜럼버스의 동상이 바르셀로나 항을 멀리 바라다보고 서 있다. 오랜 과거의 영화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민들의 여유로움은 일광욕을 즐기는 젊은 남녀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이국인들의 맘을 유혹한다. 대형 크루즈가 관광객을 부려놓고 정박해 있는 모습, 바르셀로나 항구의 풍경이다.
그리고 부자들의 요트들이 하얀 돗대를 펄럭이면 바다를 가를 꿈을 꾸면서 줄지어 서 있는 모습 또한 아름답다. 그리고 부럽다.
2.9. 올림픽과 몬주익 언덕의 황영조기념비 바로셀로나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는 도시이다. 1992년 올림픽이 개최된 곳이고,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1등을 한 곳이기도 하다. 몬주익 언덕에 당시 황영조의 모습을 조각으로 남겨두고 있다.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자랑스럽게 기념 촬영을 했다.
몬주익은 ‘유태인의 산’이라는 뜻이다. 몬주익 언덕에는 몬주익 성, 미로 미술관, 카탈루냐 미술관 등이 있고,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어 시간을 갖고 즐길 수 있다.
2.10. 플라스틱 재생을 위한 분류공장 견학 카탈루냐에 있는 프라스틱 폐기물 분류공장을 견학했다. 현지 가이드가 공장을 찾지 못해 1시간 이상 헤매었다. 사전에 현장을 확인하지 못한 잘못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만스러워 했다.
이 공장에서는 바르셀로나와 주변의 30개 도시에서 배출되는 프라스틱을 처리하는데 1년에 14,000톤을 종류별로 분류처리 한다. 콘베어 벨트를 통해서 선별하는데, 중간중간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위생상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국물 있는 음식물을 사용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건조한 음식물을 사용하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는 냄새가 적게 나는 편이었다. 폐품은 재질별로 형상별로 색깔별로 몇 가지로 구분해서 분류하여 재생공장으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초등학교 1~2학년 학생들이 매일 공장을 견학하고 있다는데, 어릴 때부터 분리수거에 대한 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킨다고 했다.
2.11. 지방언어를 가르치는 스페인 스페인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국어인 스페인어 이외에 그들만의 지방어를 따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유학생들이 정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2.12. 호평받는 한국의 전자제품 바르셀로나에서는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제품이 상당히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스페인과 게임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한다.
2.13. 부러운 사회보장제도 스페인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사회보장이 잘된 나라이다. 의료비는 전액 무료이고, 65세가 되면 정년퇴직이 가능하고, 시에서 관리하는 소수정원으로 운영하는 양로원에서 생활할 수 있다.
학비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전액면제(시립대학에 입학할 경우 입학금납 납부함)이지만 스페인도 아이를 낳지 않아 매년 7개의 초등학교가 문을 닫는다고 했다. 그래서 자녀가 3명 이상이 되면 세금을 면제하고, 3번째 자녀에 대해서는 그 아이가 원한다면 해외 유학까지 시에서 책임을 진다고 했다.
[내용에 포함되지 아니한 바르셀로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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