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22일에 내가 만난 숫자들의 모습  
작성자 : 윤혁경 | 등록일 : 2004-5-6 | 조회수 :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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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나는 숫자들의 조합이다. 방안의 어둠이 남아 있는 핸드폰에는 05:40이라는 녹색글씨를 만나는 것으로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다. 나도 시계가 없다. 그러나 시간을 알 수 있다. 핸드폰에서 TV에서 지하철에서 어디든지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둘러 샤워, 드라이를 마치고나서 허둥지둥 밥을 먹고 집을 나서는데 TV에선 06:39분을 가르키고 있다. 현관문에는 406호의 표시가 있고, 101동에 있다. 아파트단지 후문에 있는 5번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옆에 있는 전화박스를 들여다보면 무슨 숫자이든지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는 번호판이 보인다. 아담한 마을버스 안에서도 붉은색의 숫자들을 만나게 된다. 버스카드를 찍을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숫자를 보면서 어떤 사람이 타는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안다. 38400원이 남은 사람들은 정장을 한 셀러리맨일 것이고, 5730원이 남았다면 학생이고, 900원만 남았다면 아가씨일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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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버스 운전기사에게 ‘수고했습니다’라는 인사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모두 무기력하고 무표정한 모습이다. 바쁜 걸음만 재촉할 뿐이다. 지하철 4호선 미아삼거리역에 도착하면 천정에 매달린 무표정한 시계가 06:54을 가르키고 있다. 나는 항상 3-1번 위치에서 전동차를 기다린다. 동대문운동장에서 2호선을 갈아타기 위해서이다. 사실 5-3번에서 타면 갈아타기가 쉽지만 5호선을 타는 딸과 함께 가기 때문이다.

달리는 전동차 내부에도 온통 숫자뿐이다. 내가 탄 칸의 차량번호가 4763호였다. 그 뿐인가. 무료일간지에도, 지하철 노선도에도 온통 숫자로 나타내고 있다. 동대문 운동장에 내리면2호선과5호선을 갈아타는 곳을 알려주고, 출구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팻말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공중전화의 자판, 시계, 그리고 광고판의 전화번호들, 열차시간 안내표등이 숫자로 존재한다. 동대문 운동장 고유번호가 205이고 을지로4가역은 204임을 알 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동영상 광고판에선 로또 당첨금이 9천만원임을 알려주면서 유혹을 하고 있다. 을지로3가역에 정차하는 동안에도 차창에 비치는 숫자가 있다. 시청역에 도착하면 1호선으로 갈아타는 곳이 큼지막하게 표시되어 있고, 개찰구로 나서는 데에도 개찰구마다 고유번호가 있음을 보게 된다. 출구부근에선 현 위치와 주변 출구를 알리는 노란 숫자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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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주차된 차량번화가 도열을 하고 있다. 별관2동이 내가 근무하는 곳이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면서 3을 가르키고 있다. 엘리베이트의 버튼을 누른다. 내가 7번을 누를 때 닫히는 문을 갑자기 밀치고 들어선 사람이 8층을 누른다. 약간의 어둠속에 붉은색으로 나타난 7·8이 선명하다. 의지를 불태운다. 하루를  의욕적으로 시작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제일 먼저 출근하였다. 보통 7시40분이면 도착을 한다.

하루의 시작은 기도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새로운 날을 허락하시고 건강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시고, 나로 인하여 기쁨을 갖도록 하옵소서! 주신 모든 여건에 감사하고, 만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설레게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고 오늘의 일정표를 확인한다. 13:00에 광고물심의가 있고, 17:00에는 SP투데이 기자와 인터뷰 약속이 잡혀 있다. 어제 밤늦게 끝난 야경상 심사결과를 시장에게 보고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면서 시장과 부시장·국장의 일과도 확인한다. 언제 보고를 드리는 것이 좋을지를 탐색해야하기 때문이다. 시장을 만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다. 얼마나 바쁘신지, 한 번만에 보고 드린 기억이 별로 없다.

일정 확인이 끝나면 컴퓨터를 켠다. 청량한 소리가 매일 새로움을 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나온다면 더 좋겠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좌판의 숫자와 관계없이 화면에 나타난 비밀번호는 ••••••이다.  전날 퇴근 이후에 올라온 결재를 하고, 그리고 신문을 읽는다. 내보다 조금 늦게 출근한 직원이 가져다 준 일간지 5~6개를 제목만 대충 훑어본다. 이미 지하철에서 읽은 2~3개의 무가지의 내용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관심이 있는 부분만 들여다보는데 대개 10분도 안 걸린다. 신문 읽기가 끝나면 수첩을 열고 그 날 할 일을 메모한다. 직원들에게 시킬 일도 머리로 정리한다. 기분 나쁘지 않게 어떻게 지시하는 것이 좋을지 방법도 생각해 본다. 존칭어를 사용해야 되는 사람도 있고, 친구처럼, 동생처럼 하대조로 이야기해야 하는 직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내 홈페이지를 연다. 하루에 1천명이 넘게 방문한다. 오늘까지 1125700명이 다녀갔다. 30분 정도 질의에 답변을 달아준다. 거의 매일 답변을 하지만 어떤 때는 2~3일을 그냥 넘기기도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다른 자료를 찾아봐야할 때가 그렇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바로 서비스를 할 수 없을 때가 속상한다. 어느 정도 정리를 하다보면 08:30이 되고, 직원들의 출근하는 발걸음 소리가 잦게 된다.  

자! 출발! 오늘 즐겁고 건강한 하루를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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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을 펴면서 커피를 한잔 따른다. 의사가 말리지만 그래도 생각을 정리하는데에는 커피가 제격이다. 원두커피 향기가 좋다. 여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시키기가 싫어서 직접 차를 따른다. 손님이 와도 내가 따른다. 커피를 다 마시기도 전에 결재가 있다고 한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되기까지 20분이 더 남아 있다. 야경상 심사결과 보고서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9명의 교수가 심사를 했는데, 내 생각에도 제대로 뽑은 것 같다.
그리고 한동안 뜸하게 혼자 있다. 과장이란 게 별로 좋은 자리는 아니다. 직원들이 항상 경계를 하는 자리다. 껄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전자결재를 하기 때문에 특별히 찾지 않으면 얼굴을 볼 수가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의 ••••••를 누른다. 하루에 50번은 더 누르는 것 같다. 건축사가 아파트 건축심의에 대한 설명을 한다. 옥탑을 허용하고, 발코니에 화단을 설치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미 몇 해 전부터 금하던 것을 과장이 바뀌었다고 그냥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몇 사람의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해놓고 있다고 설득했지만 심퉁한 마음이다. 그런 사람이 한 번 더 다녀갔다.
12:00에는 동아일보 기자와 국장이 점심을 하는데 배석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서울시가 하는 일에 대해 홍보도하고 이해를 구하기도 한다. 1시에는 광고물심의위원회가 있다. 지난 화요일에는 북촌 한옥심사를, 수요일 14:00에는 공동주택 건축심의를, 16:00부터 22:30까지는 야경상 심사를, 그리고 오늘은 광고물심의를 하였다.

오후가 되면 몹시 피곤하다. 의자에 머리를 기대로 눈을 붙인다. 잠시. 피곤이 풀리지 않는다.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동아일보기자가 토요일 기사를 위해 북촌 취재를 왔다. 그리고 17:20에는 SP투데이 기자와 약속된 인터뷰를 했다. 간판정책에 대해 그동안 세운 계획에 대해 40분간 설명을 했다. 퇴근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쉬고 싶을 땐 화장실을 다냐온다. 3분도 안되는 시간이지만 하나를 매듭짓기 위한 나의 행동수칙이다. 그러나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손님이 밀려있으면 몇 번을 걸러야 한다. 오줌보가 터질때까지 참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잠시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잊어버리기 전에 직원 책상을 찾아서 검토 지시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기억력이 감퇴되었음을 피부로 느낀다. 모두들 나이 탓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다. 내릴 지하철을 지나치는 것은 다반사고 방향을 바꾸어 타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놈의 생각 때문인가보다 하지만 기억력의 감퇴를 실감한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야지 하면서 일어서는데 마지막 결재를 해 달란다. 19:20분을 가르키고 있다. 또 한번의 ••••••를 누르고 결재란에 OK싸인을 한다. 그리고 설합을 잠그고 컴퓨터를 끄고 커피포트 스위치를 끈다. 그리고 자리를 일어선다. 19:4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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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과 역순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7층에서 엘리베이트를 타면서 1층을 누른다. 올라가는 것 보다는 내려가는 것이 기분 좋다. 1층에 있는 간이은행에서 빈지갑을 채우기 위해 기계에 카드를 넣었다. 기계는 비밀번호를 누르라고 한다. 어디서나 비밀번호가 아니면 접근할 수가 없다. 비밀번호가 몇 개인지 모른다. 어떤 것은 숫자만으로 구성된 것이 있는가하면, 어떤 것은 반드시 영문과 조합해야 하는 것도 있다. 주민등록번호나 전화번호는 안 된다고 해서 지금까지 사용하던 번호를 바꾼적도 있다. 그러다보니 그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를 누르니 카드와 명세표가 나오고 돈이 나왔다. 기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접점이 비밀번호이다. 앞으로 사람과 사람의 인식을 비밀번호로 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감옥에서는 이름 대신 번호로 통칭하고 있다는 점, 우습게 볼 일 아니다.  
퇴근시간의 지하철은 만원이다. 피곤한 몸을 더욱 피곤하게 한다. 2호선을 타고 동대문에서 4호선을 갈아탔다. 그 순간 헨드폰 벨이 울린다. 대구에서 세미나차 올라 온 하재명 교수가 저녁을 먹다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고 했다. 친구가 나오라고 하는데, 그 자리에 갔다간 한 두 시간 안에 끝날 일이 아니기에 유혹을 물리치고, 과감히 집으로 향했다.
미아삼거리역과 5번 마을버스, 무거운 가방에 파김치가 된 학생, 술 내음새 풍기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 그들이 찍은 버스카드의 잔금이 붉은 글씨로 출근 때보다 작은 수치로 나타내고 있다. 아파트는 재개발사업으로 건축한 것이어서 산 꼭대를 돌아서 내리도록 되어 있다. 정상에서 북한산과 그 마을을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모를 것이다. 아름답다. 밤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인식하는 날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내게는 불행이다.
101동 406호 문 앞에서 하루를 마감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띵이잉~동’, 오늘은 아내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이할까 궁금하다.

0:1 26.10.1931↲
시(詩) 제4호
환자의용태에관한문제

진단 0:1 26.10.1931 이상(以上) 책임의사 이상

이상의 오감도중에서 나오는 한편의 시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른다. 난해하다. 그는 천재다. 아마, 오늘날 우리가 숫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을 미리 보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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