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飛行看山 旅行記-이스탄불  
작성자 : 윤혁경 | 등록일 : 2003-12-16 | 조회수 : 341


5. 동서양이 함께 한 이스탄불



마드리드에서 이스탄불로 향하는 기내식에서 돼지고기 요리가 아님을 안내하고 있음을 보면서 이슬람 문화권으로 진입하는 것을 실감했다. 이스탄불 공항의 첫 인상은 매우 씨끄럽고 요란했다. 우리를 태울 버스 앞을 막고 있는 택시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는 운전기사의 다혈질적인 모습, 왠지 모르게 정겹다.

터키사람들은 우리나라를 피를 나눈 형제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1950년 6.25에 3천명이 참전하여 700명의 전사자를 배출한 일 때문이다. 지난해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터키와 3위, 4위 결승전은 더욱 우애를 다지고 싶어 한다. 월드컵 이후 터키로 여행하는 한국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이스탄불은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터기 제국의 수도로 1,600여 년간 번성했던 역사의 도시다. 이스탄불은 서기 330년 콘스탄틴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1453년 술탄 메멧 2세에 의해 함락 당하여 이슬람의 나라가 되었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르스 해협(Bosphorus Straits)을 끼고 동․서양(아시아와 유럽)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고, 실크로드의 시점이자 종점인 곳이다. 경제가 집중되는 곳이다.



매년 38,000척의 배가 드나든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스탄불의 경제사정은 형편없다. 터키의 국민소득이 3,000불이고 이스탄불은 7,000불이라고 한다. 그러나 빈익빈부익부 현상의 심화로 우리가 거리에서 만난 보통 시민들은 3,000불도 안되는 것 같았다. 같은 이스탄불이라 하더라도 유럽 쪽은 아시아 쪽보다 훨씬 경제력이 높다.

유람선을 타고 한바퀴 도는 동안 해변 양쪽으로 펼쳐진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약 30km 길이에 그 폭은 3,500m에서 700m까지 변화가 심한 강변에는 고대유적지, 아름다운 마을, 울창한 숲이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다.



이스탄불의 경제력으로는 그 많은 문화재를 유지하고 관리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 같다. 곳곳에 산재한 문화재 대부분이 시급하게 손을 볼 것이 많았다. 유네스코의 지원이 있다지만 먹고살기 어려운 당장의 여건에서 문화재에 투자우선 순위를 두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까웠다. 비잔틴 시대에 만든 2층 수도교가 지금은 교통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 이를 철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비용을 대어서 도로를 개설하고 그 수도교를 우리나라의 박물관에 이전한다면 어떨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5.1. 신의 뜻대로 - 인샬라(In Sha'allah)
‘신이 원하신다면’이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표현이다.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찌그러져도 ‘인샬라’로 끝낸다. 신이 이렇게 했으니 네 것은 네가 고치고, 내 것은 내가 고치자고 헤어진다. 불확실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모든 것을 알라가 그 일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소망과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현세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를 잘 지키고 착하게 살면 내세엔 알라가 그 보답을 해 줄 것이라는 사고가 그들을 무기력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터키인은 신분증에 종교를 기재해야 하는데 이슬람이 아니더라도 이슬람으로 기재한다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직장이나 모든 일에 있어서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이 신의 뜻인지도 모르는 일이겠지?


5.2. 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
술탄 메멧의 지시에 따라 시난(Sinan)이 주도하여 1478년에 완성되었다. 시난(Sinan)은 톱카프 궁전 이외에도 이스탄불에 290채 이상을 건축했다.

이 궁전은 궁정, 정자, 모스크, 우물로 크게 4개의 궁정과 하렘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궁전에는 25명의 술탄이 거주했으며, 400년간 오스만제국의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지금은 당시 왕가에서 사용하던 각종 보물과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모세의 지팡이와 요셉의 모자, 사도요한의 두개골과 손을 전시하고 있다. 그들은 이를 위해 기독교도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5.3. 지하궁전(Yerebatan Sarayi)



비자틴 제국시대인 542년에 물을 저장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높이 8m의 돌기둥 336개가 길이140m, 너비70m의 저수장으로 당시 성안에 있는 시민 5만명이 7개월간 먹을 수 있는 물을 저장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메두사의 두상을 옆으로 누이고 그 위에 기둥으로 눌러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화려함이 대단하여 지하궁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지금은 저수조로 사용하지는 않고 관광코스로 이용하고 있는데, 어두운 공간에 영상장치를 설치하여 마치 물속의 궁전에 와 있는 착각을 느끼게 한다. 한쪽에선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빛을 물과 잘 조화시키는 그 아이디어가 너무나 참신했다. 단순히 어두운 지하만 보여 주었더라면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포장술이라고 보아야 한다.

5.4. 블루 모스크(Sultan Ahmet Mosque)
이슬람과 비잔틴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마주하고 있다. 블루 모스크와 성소피아 사원이 아주 가까이 한 자리에 있다는 점, 서로 다른 두 문명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 이스탄불의 또 다른 1609년 술탄 아호멧 1세가 톱카프 궁전을 설계한 시난의 제자이던 메흐멧 아가(Mehmet Aga)에게 성소피아 사원에 버금가는 사원을 짓도록 명령하여 8년 만에 완성했다. 직경 23.5m, 높이 43m의 거대한 중앙 돔을 중심으로 6개의 첨탑을 세운 아름다운 사원이다.
여기에 재치있는 이야기가 있다. 술탄으로부터 황금으로 첨탑을 세우도록 명령을 받은 건축가는 고민이 생겼다. 황금을 구하기 위한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할 때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건축가의 고민은 6개의 첨탑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황금(Altin)과 6(Alti)가 비슷한 점을 이용해서 6개의 첨탑을 세우고 술탄에게 그렇게 명령을 받았다며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다.



블루 모스크(Blue Mosque)는 내부를 장식한 이즈닉 타일 색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99가지의 푸른 타일로 내부를 장식했는데 260개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과 어울려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 블루 모스크의 내부를 관람하기는 쉽지 않다. 하루에 5번의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빈틈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1시간을 기다린 끝에 블루 모스크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다.



5.5. 성소피아 사원(Hagia Sophia)
세계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는 성 소피아 사원은 유스티니안 황제가 안테미우수(Anthemieus of Tralles)와 이스도루스(Isidorus of Mulet)에게 명하여 532년부터 5년간 건립했다. 돔의 직경은 30m, 높이는 56m의 규모다. 준공식에 참석한 유스티니안 황제가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앞질렀다오!’라고 외쳤다고 한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 이스탄불을 함락한 메멧은 사원내부에 아름답게 꾸민 성화를 석회로 덧발라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1933년 아타튀르그의 명령에 따라 박물관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아쉽게도 시간 제약상 내부를 둘러 볼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외부의 모습을 비추어 상상할 수밖에.........






5.6. 히포드롬(Hippodrome)
블루모스크(Blue Mosque) 우측면의 광장에는 오빌리스크와 뱀기둥, 석탑이 서 있는 광장이 있는데 이곳은 비잔틴제국 당시 마차경주와 검투경기 등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길이 400m에 너비120m로 약 4만명의 관객이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두 번의 참수가 있었다. 비잔틴 제국시 4만 명의 반란군이 참수되었고, 오스만 제국시에는 3만 명의 근위대가 참수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광장에 서있는 오빌리스크는 로마의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룩소에서 가져왔는데 운반도중 반토막이 나 현재는 20m 높이 뿐이다. 바로 옆에 있는 3마리의 청동뱀은 머리가 없이 하늘로 향하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의 아폴로신전 델피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볼품없는 석탑은 940년에 석회석 돌로 기둥(높이 32m)을 만들어 그 위에 청동으로 덮어씌우고, 그 위에 농부와 어부의 모습을 조각해 두었으나 제4차 십자군이 들어와 도시를 파괴하면서 청동을 벗겨서 가지고 가버렸다고 한다. 볼품없는 석탑 그 자체가 지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5.7.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r)
이스탄불엔 크고 작은 시장이 여럿 있다. 그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가장 큰 시장이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r)다.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고 1455년~1461년에 걸쳐 시장을 만들었다. 오토만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으나 몇 번의 복구 끝에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바자르에는 미로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한번 잘못 들어가면 들어간 출구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모두 18개의 출구가 있으며, 4천여 개의 점포가 각양각색의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아이쇼핑을 하는 것도 권하고 싶다. 시간이 허락하면 1~2시간은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선 흥정을 잘하면 절반까지 물건값을 깎을 수 있다. 대부분 부풀려 부르기 때문에 30%까지 깎을 수도 있다고 한다. 25달러를 달라는 작은 카페트를 10달러에 산 사람도 있고 7달러에 산 사람도 있었다.



5.8. 돌마바체 궁전(Dolmabache Palace)
보스포러스 해협을 연하여 술탄 압둘 메짓트 1세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여 건축기사 발리안으로 하여금 건축하게 했다. 1843년부터 1856년 사이에 건축한 궁전은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로 되어있는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2세가 선물한 4.5톤의 무게에 750개의 촛대가 있는 샹데리아가 있다. 그러나 그 규모나 위용은 베르사유 궁전에 한참 못 미친다. 알고 보니 목조위에 대리석 흉내를 내었기 때문이다.



25명의 술탄이 톱카피 궁전에서 거주했었고, 그 후 돌마바체에서 1923년 왕정이 종식되기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지금은 내부 복원작업을 수행 중에 있는데 앞으로 상당기간이 걸릴 것이고 그 비용도 만만치가 않을 것이다.



5.9. 타일의 나라
터키의 타일은 매우 독특하다. 그 무늬가 매우 아름답고, 디자인 자체도 우수하다. 특히 블루 모스크라 이름 불리우는 것도 그 타일 색깔 때문이다. 왕궁이나 사원에특히 사용되었으며,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서는 흔하게 사용한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5.10. 터키탕
터키에 왔으니 터키탕을 경험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남녀가 공동사용 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작은 호기심을 갖고 이용해 보기로 했다. 생각보다는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10명 정도가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동네 목욕탕에 비하면 턱없이 부실한 시설이다. 큰 타올 한 장을 두르고, 물을 담아 둔 욕조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몸에 끼 얻고 타일바닥에 누워 땀을 빼는 식은 우리의 것과 비슷했다.
이곳에선 이를 ‘하맘’이라고 하는데 동성이 친구나 부자간에도 반드시 타월로 치부를 가릴 정도로 예의를 지킨다고 했다. 이희수교수의 세계문화기행 19p/일빛/2003
남녀 공용이란 혼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용시간을 구분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터키탕의 원조는 터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 있었던 것을 로마인들이 전파한 것인데, 이슬람인들은 목욕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이를 종교의식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19세기 중반에 오리엔트에 대한 유럽 지성인들의 동경에 이를 파리, 베를린, 런던 등으로 전파함으로 확산되면서 ‘터키탕’으로 불려진 것이란다. 상식의 오류사전Ⅲ 261p(발터 크레머외 2인/경당/2002.11)

이 터키탕이 일본과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변질되어 외도의 장소로 변하게 되었다. 유명한 화가 앵그르가 1865년 그의 작품 ‘터키탕’에 엄청나게 많은 수의 나체여인을 표현함으로 오해를 사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몇 년 전 터키 대사의 항의로 우리나라는 이를 ‘한증탕’으로 바꾼바 있다.

5.11. 마지막 술탄의 슬픈 이야기
1923년 왕정이 종식되면서 당시 17세인 왕위계승자인 마지막 왕자는 혁명군이 내민 한 장의 종이에 서명을 하게 된다. 그곳에는 모든 왕족은 터키를 떠나되 맨손으로 떠나야하며 24시간 이내 떠나야 하고, 남자는 50세, 여자는 25세가 되지 않으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도록 했다. 마지막 왕자는 이집트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무일푼으로 쫓겨난 왕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다. 그중 몇 번의 언론에 노출되면서 그는 신분을 숨기고 파리로, 파리에서 다시 이집트로 옮겨 다니게 된다.

그러다가 70년만인 1992년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5일간 터키를 방문하게 된다. 공항에 내리자 땅에 입을 맞추고 오래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마지막 거주했던 돌마바체 궁전(Dolmabache Palace)에서 보내면서 터키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망명 기간 중 여러 나라에서 여러 가지 직업을 가졌지만 술탄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팁을 받지 않았으며,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그 가족이 술탄의 명예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또한 매일 이집트 공항 커피숍에 나와서 터키 커피를 시켜 놓고 터키로 향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터키국민들은 그에게 마지막 노후를 터키에서 보내길 원했으나 그는 지금까지 터키에 한 푼의 세금도 내지 못했는데 무슨 명목으로 정착할 수 있겠느냐며 5일간의 생활을 마치고 이집트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1년 후 어느 날 그는 혼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을 발견한 사람은 공항 커피숍 직원이었다. 며칠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의 집을 찾았더니 죽어있더라는 것이다.

5.12. 아이스크림 1개 값이 1,000,000 리라
아이스크림 1개가 1백만 리라라고 한다면? 공중화장실 이용료가 30만 리라이고, 맥주 1잔에 4백만 리라다. 관광회사의 안내서에는 맥주 1캔은 23만 리라로 되어있는데, 15배가 더 비싼 것을 보면 물가상승률이 얼마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는 약 1000배 정도로 보면 된다. 1,000,000리라는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으로 보면 된다.
터키정부는 EU가입을 목표로 EU수준으로 물가를 계속 올린다고 한다. 앞으로 얼마를 더 올릴지 몰라 터키국민들은 불안하다고 한다. 이 문제도 어쩌면 인샬라로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글을 읽고 터키를 방문할 쯤이면 얼마나 더 올라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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