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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도시속에서의 ‘나’와 ‘우리’ …….. 양 윤 재*
     
   


● 도시공간의 공공성

지난 몇 년사이 서울의 도심부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급격하게 성장한 경제발전의 덕분인지, 올림픽이라는 ‘소위’ 건국 이래의 최대의 잔치 때문인지는 몰라도 산뜻한 외모에 값비싼 재료들로 치장한 고층건물들이 제법 격식을 차리고 대로변에 늘어서 있는 모습이 전에 없이 달자진 서울의 모습이며 거리의 풍경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황당하게 확폭된 도로며 매끈한 포장, 보도를 따라 줄지어선 가로수와 가로등도 가로의 경관을 한결 새롭게 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어딘가 모를 불만스러움과 짜증이 엿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러한 도시의 풍경이 왠지 삭막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우리가 사는 도시가 복잡하다든가 녹지가 부족하거나 보행자를 위협하는 과도한 차량의 통행 때문만은 아닌 듯 싶다.
우리의 도시가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아마도 ‘도시다움’이나 ‘도시의 매력’이 결여되어 있는데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최근 지어진 몇몇의 대형건물들에서 아트리움이나 선큰가든 등을 도입함으로써 개인의 사적공간을 다소나마 개방하고 공공의 장소로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도시환경의 질적 향상과 도시의 공공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도시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집단이 한데 모여 사는 곳으로서, 사회집단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있는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는 그 사회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할 수밖에 없고, 도시형태에서 나타난 모든 것은 그 사회의 가치와 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대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몇가지의 독특한 현상들은 우리사회가 극도의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며 관료주의와 권위주의가 도시의 곳곳에서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열병처럼 일어났던 토지투기와 아파트 전매는 물론이고 신흥주택가에 들어선 건물의 형태가 그렇고 도시의 대형건물이나 공공청사의 건물형태에서 조차 ‘우리’라는 공동체로서의 연대의식이나 공공성을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도시는 본질적으로 공공성을 가지고 있으며 공공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도시는 도시민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며, 도시민 전체의 공동의 삶의 터가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도시민 개개인은 그러한 삶의 장에서 각자가 가진 자유와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와 권리는 도시의 공공성에 바탕을 두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하나의 사회가 구성되어 제대로 움직여 나가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규범과 제도가 존재하듯이 도시도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구성원리가 있고, 그에 따른 규범이 존재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제한적으로 유보되기도 한다.
우리가 도서관이나 음악회와 같은 특정한 공공의 장소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범이 존재하듯이, 도시에서 살면서 지켜야 할 윤리와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 도시사회를 형성하는 길이 될 수 있다.


● 도시속에서의 ‘나’와 ‘우리’의 의미

한국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꽤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우리집, 우리학교, 우리동네, 우리나라, 심지어는 마누라까지도 우리마누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그것이 비록 ‘우리’라는 복수소유격의 의미보다는 다분이 단수격인 ‘나’의 의미가 더 강하거나 아니면 ‘나’라고 해야할 경우에라도 ‘우리’라는 복수격을 붙임으로써 동류의식과 연대가치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규태씨가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서구는 물론이고 같은 동양적인 중국이나 일본에서조차도 자기 부모나 국가, 형제, 집 그리고 자기가 소속된 직장이나 학교, 동네, 단체 등에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이와같은 연대가치의식은 비단 여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문화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인들은 음식을 한상에 차려 놓고 모두가 함께 먹는다. 음식상에 오르는 찌개에서부터 김치, 간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식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이렇듯 ‘나’라는 존재를 되도록 배제하고 ‘우리’를 강조하고 있으며 우리라는 집단이 나를 포함해줌으로써 ‘우리’속에 존재하고 있는 ‘나’를 확인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나와 더불어 우리가 함께 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와 ‘우리’의 개념이 자칫 우리 모두의 것은 나의 것이고 내것은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우리’가 아닌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될 뿐이다. 이는 편리한대로 나와 우리를 혼돈하게되고 더욱이 어떤 일에 책임을 우리라는 집단에다 전가시킴으로써 그 책임의 소재를 불분명하게 흐려버릴 수도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어져야 할 점은 ‘우리’라는 의미 속에 공동의 소유개념과 함께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나의 책임과 의무가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도시가 여럿이 모인 ‘우리’라면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건축은 ‘내’가 되는 것이다. 도시가 오랜 세월에 걸쳐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건물은 개개인에 의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세워지고 그 소유 또한 개인에게 귀속되어진다.
그러나 그 건물이 비록 개인의 소유이며, 건축행위가 개인이 가진 고유한 자유와 권리이긴 하지만 그 건물이 지어지기까지에는 제도적인 제약과 공공의 간섭이 있게된다. 더구나 그것이 공공성이 강한 건물이라든지 도시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경우에는 좀 더 엄격한 규제와 간섭이 행해지는 수도 있다 이는 모두가 도시의 공공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해지는 행위라 하겠다.
요즈음 서울도심에 세워진 대형건물들에서 우리는 얼마만큼 ‘우리’라는 공공의 의미를 읽을 수 있으며 우리곳의 나를 발견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 공공성이라는 허울의 가장행렬

도시의 형태는 사람들에게 물리적 환경으로 작용하며, 물리적 환경은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고 체험하는 장소이며 경관이 된다.
도시 경관이나 가로경관은 기본적으로 가로와 대지 및 건물의 세가지 구성요소에 의해 좌우되며, 그 중에서도 대지와 건물에 의해 형성되는 건축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가로경관이나 도시경관의 체험은 주로 가로로부터 이루어지며, 가로경관은 또한 그 가로를 구성하고 있는 가로변의 건물에 의해서 영향을 많이 받게된다.
따라서 건축공간의 형태나 기능이 도시환경에 미치는 영향의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상당수의 건축행위에 있어서 건물자체만 많은 신경을 쏟은 나머지 인접건물이나 전면가로는 물론 하나의 건축공간으로 되어지는 대지나 대지내 공지에 대한 배려가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이로 인해 전체적인 도시경관을 해치고 나아가서 매력 없는 도시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지난 10여년에 걸친 도심부 재개발이나 신시가지개발에 있어서 행해진 건축행위는 표면적으로는 공공성을 내세우고 있는듯하지만 실제 그 내용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개인에 의해서 지어지고 개인에 의해 소유되어지는 건물이 굳이 공공성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문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구하기란 쉽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건물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공공성에 바탕을 둔 토지가 마련되어야 하고 도시의 대표적인 공공공간이 가로가 전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일단 세워진 건물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며, 사람들에 의해 보여지기 때문에 공공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 대도시의 도시건축은 리런 관점에서 볼 때 몇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공공을 위한 공간의 제공과 장소성의 창출에 매우 인색하다는 점이다.
이는 주로 간선가로변의 대형건물들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건축선 후퇴부분의 처리에 있어 단을 높인다든지 화단을 조성하여 시각적인 개방감은 주고 있지만 실제로는 교묘하게 통행인들의 접근을 의도적으로 막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서울도심에 있는 롯데백화점의 경우, 엄청난 보행공간이 상대적으로 좁아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불편을 주고 있다.
더욱이 이 지역은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특정가구정비지구로서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을 부여받아 개발을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초의 소공동과 을지로를 연결하고 있던 보행통로와 보행광장을 없애고 백화점과 호텔의 이용객을 위한 주차장으로 전면 할애하는 계획을 세워 추진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바로 잘못된 상업자본주의에 의해 도시의 공공성이 박탈당하는 본보기라 하겠다.

다음으로는 가로의 존재를 무시한 20세기초 서구의 근대건축이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도시와 건축을 별개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다도해의 섬들처럼 저마다 각양각색의 꼴을 갖추고 서로 자기네 섬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고있는 것과 같다. 대형건물의 입구는 바로 그 섬의 유일한 포구이며, 일단 그 섬에 내리게 되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하도록 되어있다. 도시의 길은 바다 위의 항로는 아니며, 대형건물의 지하상가가 거리에 면한 가가가 될 수는 없다. 현대의 도시생활에서 도시민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건물속으로 숨어들어 간 인공조명등 아래의 좁은 미로일 뿐이다.
그나마 도심재개발에서 구역마다 할애된 공공공간으로서의 소공원은 개발주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뒤쪽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사리 그곳을 찾아가기도 어렵거니와 이용에 있어서도 불편함을 주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네 관치행정이 빚어낸 결과라 하겠다.

이와 함께 공공을 위한 장소를 만들고 조경공간으로서의 의미를 확보하기 위한 선큰가등은 결과적으로 볼 때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욱이 부족한 보행공간을 침해하는 비공공적 요소로서의 역할을 하고있을 뿐이다.
도심의 선큰가든이나 터미널 등 보행자들의 밀집지역과 연계성을 가지면서 보행자들의 편익과 안전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하고, 도심의 오픈스페이스로서 다양한 장소성를 갖어야 한다.
그러나 명동의 외환은행본점이나 계동의 현대그룹사옥에 만들어진 선큰가든은 자기네 건물속에서 조차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린 꼴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과거 중세봉건시대의 성곽도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해자와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는 달리 여의도에 세워진 력키금성트윈타워에 있는 선큰가든은 고급스런 지하상가로 사람들을 유인하고자 하는 얄팍한 상혼의 발로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이에비해 최근 완공된 종로의 제일은행본점에 조성된 선큰가든은 다소나마 공공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이고는 있지만 보도와의 적극적인 연결을 차단하고 있어 불만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행정체제아래에서 개인의 건물에 이와같은 선큰가든이나 선큰프라자를 조성하여 대중교통수단과 직접 연결한다든지 보도와 유기적으로 관련성을 맺어 명실상부한 공공의 장소로 조성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옹색한 공간의 조성보다는 좀더 솔직한 해결방안을 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작 공공에 의해 지어지고, 공공에 의해 사용되어지며, 공공을 위한 건물들이 앞장서서 공공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태평로와 세종로에 늘어서 있는 관공서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고, 출입문에는 마주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의 엄숙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제복의 사람들에 의해 시민들은 주눅이 든다. 한국문화의 대표적인 전당이라는 세종문화회관마저도 지극히 공공성을 배제한 권위주의적인 형태와 아무도 가지 않고 쓰지도 않는 ‘광장’이 길로부터 4~5미터의 높이에 댕그라니 앉아있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지금 한창 완공을 서두르고 있는 서초동의 ‘예술의 전당’이나 이미 완공된 과천의 ‘현대미술관’도 그 건축적인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소위 공공성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시민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고 일상생활 속에서 부담없이 예술과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한채 자리잡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한 시민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사회의 정의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고있는 것으로 알려진 법원이나 검찰청사의 주변건물은 하나같이 시야를 차단당해야 하고, 현재 신축중인 강남의 신청사 주변에도 고도제한을 설정하여 신성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무시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과연 지정한 도시의 공공성이 확보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도시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이와 같은 우리의 도시풍경은 그야말로 권위주의와 상업주의, 개인주의와 전체주의가 만들어낸 가식적인 ‘민주주의’의 가장행렬인 듯 하다. 공공의 탈을 쓴 관료주의가 그렇고, 자본주의를 앞세운 상업주의가 짙은 화장아래에서 시민들을 우울하게 하고 있다.


● 도시의 민주화와 건축의 자유화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바램은 매우 소박하다. 그들은 아침, 저녁의 출퇴근길이 명랑하길 바라며, 길을 가다 잠시 쉴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갖길 원한다. 더운 여름날 더위를 식혀줄 수 있는 가로수가 있고, 활기찬 거리의 모습에서 생동하는 ‘우리’의 표정을 읽으면서 앞날의 희망찬 꿈을 그려볼 수 있으면 그만이다.

도시민 등은 다도해를 떠다니는 통통배도 아니며, 높은 절벽의 그늘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다녀야 하는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민주’나 ‘공공’을 앞세운 가장무도회의 어리석은 관객이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도시의 주인은 돈 많은 재벌이나 권력을 가진자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모두가 주인이다. 민주사회의 도시는 도시민의 것이어야 하고, 또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내’가 됨으로써 도시의 공공성은 확보될 수 있다.

‘우리’라는 도시 속에서 ‘나’라는 건축이 누릴 수 있는 자유도 내가 가진 사회적 의무돠 책임의 역할을 스스로 느끼고 실천할 때 비로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도시 속에서 잃어왔고, 무심코 지나쳐버렸다. 이제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민주화의 시대에 거는 기대는 도시의 주인으로써 ‘우리’을 되찾고, 그에 어울리는 민주시민으로서의 ‘나’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 * 양윤재 교수님은 언제나 얼굴이 붉습니다. 童顔이십니다. 카랑카랑한 말씀은 항상 자신에 차
* 있는 모습입니다.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로 계시는데 도시설계분야에 일가(?)를 이룬
* 분이시기도 합니다.
* 현재 서울시 도시계획위원으로 계시며, “저소득층 주거지 형태연구”,” 복합화구상연구” 등의
* 저서가 있으며, 30여편이 훨씬 넘는 논문을 발표하시고, “분당 백궁 정자지구 도시설계변경
* 타당성 검토 연구”등 수행한 프로젝트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야말로 정열적이신
* 분이십니다.
* 「양윤재 교수의 도시설계연구실」(https://plaza.snu.ac.kr/~udforum/)에 들르시면 좋은 자료를
*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