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건축설계와 공사 감리자의 업무 구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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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강동구청 건축1계장에 있을 때의 일이다. ● 설계자가 공사감리를 하는 것이 옳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바늘과 실이다.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건축가-여기서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건축사가 맞다. 면허를 받고 등록을 하지 않으면 영업을 할 수 없도록 건축사법에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계는 건축사만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제도권 밖의 사람 중에도 건축사 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있고, 그들이 설계한 것들을 등록 건축사 명의로 허가를 신청하는 경우가 사실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통칭하여 건축가라 부른다. 사실은 건축사의 모임체인 『대한건축사협회』와 제도권 밖의 사람들이 모인 『대한건축가협회』가 『대한건축학회』와 병존하고 있다. -가 설계한 건축물을 본인이 공사감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공사감리는 설계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자가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 공사감리의 정의 공사감리란 무엇인가? 건축법이나 건축사법에서는 「건축설계대로 시공되는지를 확인하고 공사관리·안전관리·품질관리를 행하는 자」를 공사감리자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호하다 설계대로 시공되는지란 어디까지를 말하는가? 외형적인 상태를 말함인가? 아니면 완벽한 품질까지 확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공사감독과는 또 어떻게 다른 것인가? 공사관리란 말도 그렇다. 건축주와 시공자간의 계약내용이 제대로 지켜지도록 관리한다는 말인데 그도 또한 쉽지 않은 문제다. 안전관리의 한계도 시공자와 감리자의 업무한계가 분명하지 않다. 공사감리자의 자격이나 업무의 범위도 공사규모에 따라 달리 정하고 있어 위의 정의는 더욱 혼란스럽게 된다. 전문 책임감리나 건축 책임감리를 요하는 건축물이 있는가하면 상주공사감리, 필요한 공정시에만 현장을 확인하는 일반공사감리까지 크게 3단계로 구분한다. 당사자간의 계약방법에 따라서는 이 보다 더 다양한 형태의 감리로 세분할 수도 있다. 책임감리 대상이나 사업승인 대상 공동주택은 건설기술관리법과 주택건설촉진법에서 설계자와 공사감리자가 다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건축법에 의한 허가대상 건축물은 건축주가 설계자를 감리자로 선정하던 다른 건축사를 공사감리자로 선정하던 자유다. 다른 건축사를 감리자로 선정할 경우 감리비를 추가 부담해야하는 현실 때문에 99.9%가 설계자를 감리자로 선정하고 있다. 소규모 건축물은 아예 공사감리비를 줄 생각도 받을 생각도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일주일에 고작 한 두번 현장 확인을 하는 소규모 건축물의 경우 품질관리나 공사관리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반드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그에 상응하는 감리비용을 지불한다면 말이다. ● 공사감리제도의 도입 건축법에서 공사감리가 도입된 것은 1972년도의 일이다. 처음엔 다소 허술하였지만 점차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독립기념관 화재를 기화로 건설기술관리법이 제정됨으로 감리전문회사가 등장하게 되고, 주택건설촉진법에 의한 사업승인을 받는 공동주택에 대한 감리강화가 이루어지는 등 체계적인 감리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감리가 제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건축주가 제공하는 비용으로 건축주의 위법을 감시하는 감리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결국 감리제도의 변천은 위법의 변천과정과 다르지 않다. 1980년대 이전에는 건축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축물의 품질을 요구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면적 증가는 보통이고, 지하층 노출, 대지 안의 공지 규정을 위반하는 등 준법 정신은 형편무인지경이었다. 소규모 건축물은 소위 집장사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건축설계도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려주어야 했다. 그들은 건축사의 주요고객으로서 이를 감리·감독해야 할 건축사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누가 빨리 건축허가를 받아 주는가에 따라 유·무능한 건축사로 구분되고, 위법을 적당히 눈감아 주고, 문제가 생겼을 때에 잘 해결해주는 건축사가 일을 많이 수주할 수 있었다. 그러니 건축허가나 준공검사시 돈 거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상할 노릇이었다. 감사원·검찰 등 사정기관에 의해 징계를 받거나 구속되는 공무원들이 적지 않았지만 쉽게 줄어들지가 않았다. 줄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집장사의 손에 건축사의 운명이 달려있는 그 구조를 깨지 않고는 제아무리 감시감독과 처벌을 강화한다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 건축사 3인 연서제도의 도입 문제해결의 방법으로 건축사와 공무원의 접촉을 차단하고 설계자와 준공검사자를 구분하는 것으로 선택했다. 이러한 조치는 건축행정에 있어서 큰 획을 긋는 일이었다고 본다 그 당시는 주택이 전체의 60∼70%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주택의 허가권과 준공권을 분리하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공무원은 허가에서 준공까지 현장방문을 할 수 없게 하고, 모든 것을 건축사에게 위임하였다. 건축허가는 설계 건축사의 현장조사 복명에 의해 처리하고, 준공은 다른 건축사 3명이 확인하고 연대하여 서명하게 하였다. 소위 연서라는 말이 이 때 태어난 것이다. 1977년부터 1980년 초까지 운영되었던 제도다. 그러나 이 제도도 오래 갈 수 없었다. 위법은 줄어들 줄을 몰랐고, 연대 서명한 건축사만 애꿎게 처벌받는 결과만 초래하여 징계를 받지 않은 건축사가 없을 정도가 된 것이었다. 같은 건축사끼리 매정하게 일을 처리할 수도 없거니와 집장사의 손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여건에서 다음에 자신이 수주한 건축물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제도는 실효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좌제라는 혹평으로 연서제도는 폐지되고 만다. 결국 허가와 준공 모두를 설계 건축사가 처리하던 당초의 제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82년 9월부터는 주택이외에 2층 이하 1,000㎡미만인 근린생활시설까지 그 범위를 확대하여 건축사에게 위임하였다. 그 결과 위법행위는 오히려 증가하였다. ● 설계·감리의 구분 징계를 받은 건축사가 부지기수였다. 그 들은 자구책으로 설계·감리 구분안을 제시하였다. 필자가 강동구청 건축1계장에 근무하고 있을 때인 ’83년도의 일이었다. 강동구 건축사회에서 그렇게 결의한 것이다. 설계건축사는 감리를 할 수 없도록 하고, 감리건축사는 설계를 할 수 없도록 함으로 소위 집장사들로부터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살길이라는 것을 실감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에게 이 일이 맞겨졌다. 성공을 예감했다. 우선 강동구만 시범운영해 보기로 했다. ’83년 3월 1일 시작했다. 처음엔 감리를 지원하기 주저했다. 30여명의 건축사중에서 겨우 5명만 신청했다. 그 당시 잘 나가는 몇몇 건축사는 1년에 200여건 이상의 설계하는 호황을 누렸지만, 감리를 지원한 건축사들은 겨우 풀칠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범 운영기간인 7개월 동안 그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보조원도 제대로 둘 수 없었던 그들은 7개월 동안 무려 7∼8천만원씩 수입을 올렸으니 말이다. 그해 3월부터 9월까지 무려 1천여건 이상을 5명의 건축사가 감리를 했다. 똘똘 뭉쳐 열심히 했다. 집장사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한 두달이 지나자 지역 전체의 분위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위법이 누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설계 건축사들도 집장사들의 은근한 압력에도 의연히 대처할 수 있었다. 감리건축사의 핑계를 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법 적발률이 40%를 상회하던 것이 10%대 이하로 뚝 떨어진 것이었다. 성공적이었다. 서울시는 동년 10월1일부터 전 구청으로 이 제도를 확산시켰다. 같은 해 11월에는 전국적으로 확대 운영하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슬슬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감리를 맡은 건축사들이 약속을 어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집장사들이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는 감리건축사들을 유혹했다. 몰래 설계건을 갖다주었고, 몇몇 양심 없는 감리건축사들은 다른 지역의 건축사 명의를 빌어 설계를 하였다. 세상에 누굴 속일 수 있겠는가. 금방 소문이 나고, 설계 건축사들의 반발은 급기야 약정한 업역권을 무너트리고 말았다. 설계건축사도 감리를 할 수 있도록, 감리건축사도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함에 따라 종전의 상태로 위법이 늘어나고, 서로 눈감아 주는 형식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채 3년도 채우지 못하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결국 건축사들은 집장사들의 농간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람의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잃어버린 감리비 찾기 설계·감리를 구분하기 전에는 설계비는 평당 5천원을 넘지 못했다(지역에 따라 차등은 있었다). 건축사 보수요율과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그 선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감리비는 아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요구할 수도 없었고 건축주 또한 줄려고도 생각지 않았다. 아마 감리비를 요구하는 건축사가 있었다면 며칠 못가서 문을 닫아야만 했을 것이다. ’83년 3월 설계·감리업무가 구분되면서 설계비 이외에 감리비를 평당 3천원으로 결정했다. 건축주의 입장에선 예상치 않았던 비용을 추가 지불해야 함으로 불만이 많았다. 자신이 부담한 돈으로 자신의 불법을 감시하는 묘한 관계에 대해 건축주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동년 11월 전국으로 확대될 때 감리비는 다시 5천원으로 인상되고, 설계비도 따라서 8천원으로 인상되었다. ’85년도에는 감리비가 1만원으로 책정되자 설계비도 1만5천원으로 올랐다. 꾸준히 상승되어 IMF가 오기 전만 하더라도 설계·감리비를 합하여 12만원에서 15만원 정도였다. 설계·감리제도를 구분하기 전과 비교한다면 격세지감이 든다 ● 건축사 스스로 판 무덤 당초 의도한 바와 달리 변질된 설계·감리 구분제도를 그런대로 수년간 유지하였다. 그러나 건축주의 입장에선 비용만 부담할 뿐 아무 이익이 없는 제도였다. 오히려 간섭만 하고, 심지어는 위법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금품을 요구하는 건축사들도 없지 않았다. 결국 10년만인 ’94년 1월 행정쇄신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이 제도는 폐지되고 말았다. 따라서 종전처럼 설계자가 설계·감리업무를 같이 할 수 있도록 환원되었다. 물론 건축주가 원할 경우엔 설계 감리를 구분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구분한 경우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감리비가 사라진 것은 어쩜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매년 수백억원의 감리비가 고스란히 사라진 것이었다. 그 때서야 자신들의 판단착오를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떠난 기차를 붙잡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97년 대한건축사협회에서는 지역에 따라서는 폐지된 설계·감리 구분업무를 다시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제지를 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 새로운 제도의 등장 ’99년8월 서울시에서는 사용승인신청 전에 위법여부를 확인할 특별검사원제를 도입했다. 위법이 줄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증가되기도 했다.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심각한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서울시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징계가 없는 모범 건축사 145명을 뽑아 특별검사원으로 임명하였다. 그 비용은 시가 부담했다. 1건 조사마다 약 14만원씩 수수료를 지급했다. 너무 엄격하게 지적한다하여 같은 건축사끼리도 다툼을 한다고 했다. 자신이 없는 건축사들은 스스로 특별검사원을 반납했다. 시작한지 7개월만에 83명으로 줄어들었다. 99년도 서울시가 점검한 건축물의 16%(4,283건)가 위법으로 적출되었다, 반면 특별검사원이 확인한 것은 198건중 3건(1.5%)만 경미한 위반으로 적발되었을 정도이니 일단은 이 제도가 성공이라고 본다. 이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위법을 하지 않겠다는 건축주시공자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건축사들도 건축주나 집장사로부터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행정기관도 꼭 뿌리뽑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일과성의 헤프닝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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