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억세게 시험 운이 좋은 사나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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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과외는 엄두도 못 낼 형 편이었다. 그 당시 과외를 받을만한 학생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나머지 보통학생들은 밤 9시까지 학교에서 입시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게 유일한 공 부수단이었으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운이 매우 좋은 사람중의 하나이다. 특히 시험 운이 좋은 편이다. 중 학교 입시에서 전교 4등을 했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에서는 최고였다. 사실 국민학교에서의 성적은 그리 내 놓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중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일 이후부터 내 인생에 있어서 시험운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덕분에 국민학교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받을 수 있었다. 중학교 생활 또한 시험 없이 지낸 달이 없었다. 정말 시험 없는 세상에 살고 싶었다. 매달 치른 성적순으로 자리를 바꿔 앉아야 하는 중압감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시골 중학교에서 대구에 있는 청구고등전문학교 건축과 시험에서 40명중 14 등으로 입학했다. 대학교를 가지 못할 사람들 중에 유능한 인재를 골라 전문 가로 양성하겠다는 취지로 고등학교와 대학과정을 합친 소위 5년제 전문학 교, 당시에는 일반 고등학교 시험에 앞서 특차로 치뤘다. 그 시험에서 14등 으로의 합격은 당시 시골 중학교에서는 기록될만한 사건이었다. 전문학교에서의 시험도 만만찮았다. 처음에 따라가기가 힘들었지만 나중엔 장학생(전면 장학생이 아닌 반장학생)을 할 정도는 되었다. 군생활도 시험의 연속이었다. 사격시험, 태권시험, 정보시험, 심지어는 휴가 를 가기 위해 치르는 시험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시험을 치뤘다. 그 때 마다 운 좋게 잘 통과할 수 있었다. 정말 운 좋게 말이다. 제대를 한 후 주식회사 금강에 건축직 사원 채용시험에 처음 응시했다. 결과 는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제대한지 한 달도 안된 시점에 치른 시험이었는데 얼마나 공부를 하지 않았던지 주관식 50점짜리 문제가 “철근콘크리트 피복 에 대해 아는대로 기술하라”는 것이었는데 철근 콘크리트 피복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낙방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던가? 별 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낙방한 그 순간의 씁쓸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절치부심, 두번째 시험은 1977년 서울시 건축직 5급을류(지금의 9급) 공무원 시험이었다. 40명중 2등이었다. 세 번째는 건축시공기사 1급 자격 시험이었 다. 학원에 무려 4개월을 다녔다. 얼마나 많은 책을 보았던지 문제지만 키 높이만큼 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는 보기 좋게 낙방했다. 1978년 3월 서울시 7급 건축직 공채시험에 응시를 하였다. 20명중 4등에 합 격하였다. 네번째 시험이었다. 다섯번째는 2급 시공기사 시험이었다. 합격했었다. 이에 힘입어 다시 1급시 공기사시험에 다시 도전을 하였다. 작심을 하고 독서실에서 2달을 버텼다. 결과는 좋았었다. 일곱번째 시험은 6급, 구청 건축계장 시험이었다. 7급 공무원으로 발령받은 지 2년 1개월만의 일이었다. 갑자기 시험대상이라니 황당했었다. 보따리를 싸들고 누님 집에서 한 달을 기거했었다. 12명을 뽑는 시험에 36명이 응시하 여 12등에 합격했었다. 1980년도의 일이었다. 28살에 구청계장을 단 나는 하 늘을 날 것 같았다. 1985년 건축사 시험에 응시하기로 하였다. 경기도 의왕시가 집이었는데 출퇴 근하기가 쉽지 않아 시간적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새벽공부를 하는 부 근의 여관 생활을 시작했었다. 석 달!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새벽 6시 에서 8시까지 공부하고 출근했다가 퇴근과 동시에 여관에서 책과 씨름했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문제집이란 문제집은 모두 구해 풀었다. 안푼 문제가 없었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일본에서 출판된 문제집까지도 풀었다. 1차 시험 은 무난히 합격했었다. 2차 설계시험에 대비하여 다시 여관생활을 시작했다. 제도판을 여관에 두고 몇날 밤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그 결과 2차 시험에도 합격하고 건축사면허를 받은 그 기분은 아무도 모른다. 9번째 시험은 건축사무관에 응시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걸 고 이겨야 하는 절대절명의 시험이었다. 1988년 1월 4일부터 4월말까지 구청 가까이 하숙집에서 주경야독을 하였다. 전혀 생소한 행정법 학원을 2번이나 다니고 물리를 배우기 위해 대입시 학원에서 동생뻘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해 시험서열에 밀린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건축사 개업을 위해 송파구청으로 발령받았다. 설계사무소를 개업하겠다는 계획을 착실히 진행시켰다. 그러던 1989년 9월말 갑자기 5급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사진을 제출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다음날 보따리를 싸들고 휘경역 부근의 하숙집을 찾았다. 2 달 동안의 하숙생활은 먹고 공부하고 먹고 공부하는 연속의 생활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무관 시험 대상자에겐 2달 정도는 출근하지 않도록 배려 해줄 때 였었다. 하루 4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다. 피를 말리는 시간들이었다. 4시간의 잠도 시험에 짓눌리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었 는지 모른다. 책을 쌓으니 한길이 넘었었다. 15명이 치른 시험에서 3등, 꼴찌 로 합격했었다. 항상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콤플렉스를 풀기 위해 늦게 대학에 편입하였다. 1997년 내 나이 45세 때의 일이다. 서울산업대학교 건축공학과 3학년에 편입 을 했는데 나와 비슷한 사람이 25명이고 군대갔다가 복학한 학생이 25명으 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환경은 많은 것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오기가 생겼다. 나이 많은 사람도 젊은이 못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3학년 1학기 4.2점으로 2등을, 3학년 2학기 4.26점으로 2등을, 4학년 1학기 4.42점으로 1등을 했다. 평균 4.29점으로 현재까지는 1등이다. 대학생인 나의 딸에게 자랑을 했다. 아빠도 하는데 너는 얼마든지 희망이 있다고. 그리고 1999년 서울시립대학교에 석사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누구는 박사까 지 공부하라고 하지만 부질없는 욕심일 뿐이다. 딸 아이는 시험 없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고 한다. 나도 시험은 싫다. 시험보 다 더 싫은 게 없다. 시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주어진 선택의 시간에서는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될 그 순간을 비켜 가기 보다는 부닥쳐 이기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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