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하필이면 공무원, 그것도 말많은 건축직 공무원이 되었나요? | |||
|
직장은 구해야 하겠는데 대학 졸업장이 있는 것도 아니 요. 그렇다고 실력이 뛰어나지도, 소위 말하는 빽이란 것도 없는 나로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앞길이 막막했었다. 경제적인 사정으로 대학에 편입 할 형편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치른 어떤 건설회사의 공채시험에서 나는 보기 좋게 낙 방했다. 한 두달 집에서 뒹굴다보니 불안감과 무기력증이 엄습했다. 그런 나에게 힘이 된 건 지금의 내 아내다. 공무원 학원에 등록을 하고 등록 증을 내게 내밀며 공부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마음 같지 않아서 도무지 따 라갈 수가 없었다. 영어며 국어, 행정법과 헌법 등은 생소하기가 그지없었다. 싫증을 내고 있을 즈음 서울시에서 건축직 5급을류(현재의 9급)시험을 친다 는 공고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겨우 보름을 남겨두고 시작한 공부,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공무원에 발을 들 여놓게 된 것이다. 한 3년정도 공무원을 하다가 다른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으로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을 넘게 되었다. 직장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동안 3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가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대대적인 공무원 정화사업을 할 때 였다. 일괄적인 사표를 강제적으로 제출케 하고 내보낼 사람을 선별하여 사 표를 수리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나갔더라면 아마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 을까? 두 번째는 1985년도 건축사 면허를 취득하고 나서 개업을 할까말까 망설였 을 때였다. 한창 건축경기가 호황기였을 때였으니까 유혹이 없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는 공무원에 남기로 선택하고 말았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세 번째가 IMF시대에 공무원을 감축하는 퇴출의 회오리가 몰아쳤던 1998년 8월의 일이다. 내가 근무하던 부서가 퇴출부서여서 나 또한 퇴출대상이었다. 혹시나 하는 불안함으로 한 달여 이상 마음을 졸였다. 그래도 한편으론 퇴출 당한다면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공무원 생활은 전체 인생의 절반에 해당한다. 9급으로 출발해 서 건축사무관으로 오르기까지 숱한 역사가 있다. 감사에서 수사에서 진정에 서 상처뿐인 영광(?)이 오늘의 나 자신을 있게 한 것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 고 사선을 지나온 과거 20년은 결코 후회할 수는 없다. 후회한다는 것은 억 울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무악동 재개발사업은 평생에 한번 경험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간 600여세대를 허물고 연립·아파트로 건립한 사업은 엄청 난 경험이었다. 환지계획에서 건축설계, 시공에서 마무리까지의 과정은 한편 의 드라마였다. 지금의 재개발사업방식과 달리 대부분 행정기관이 계획을 수 립하고 행정기관이 사업을 주도함으로 공무원의 업무량은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기존 주택을 철거하면서 분뇨를 덮어쓰기도 하였으며, 불만을 품 은 주민이 칼을 품고 다니며 당한 협박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설계과정에서 는 주민과 설계자간의 중재를 위해 목이 쉬도록 설명하였으며, 산비탈을 깍 고 건물을 세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새벽출근에 늦은 밤 퇴근을 예사로 했 다. 3년 동안의 수고는 나에게 최단기 진급(7급 2년2개월만에 6급 구청계장 으로 진급)의 영광을 누리게 하였다. 1983년 3월 강동구청에서 시범 실시한 설계·감리 분리제도가 서울과 전국 으로 확산되게 한 경험 또한 잊을 수 없다. 10월에 서울시 전구에, 11월에는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게 된다. 6명의 감리자와 똘똘 뭉쳐 위법을 줄이는데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설계건축사와 감리건축사간에 업역 을 침범하지 않기로 한 약속이 무너지면서 당초 의도와 달리 유명무실하게 된다. 변질이 되었을 망정 13년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1996년 폐지된다. 그로 인하여 감리비 만큼의 수입이 줄어들게 된 건축사들은 1998년 이를 부 활하자는 논의를 하게 되지만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로 성사되지 못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영광은 1983년 송파구 건축과장에 발령받은지 3개월 만에 받은 녹조근정훈장 사건(?)이다. 그래, 그것은 사건이었다. 3개월만에, 고참 과장들을 물리치고 훈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이 아니었으면 불 가능한 일이다. 국내 최초로 건축종합민원실을 설치, 건축인허가 처리과정을 대폭 축소함으 로, 그 당시 획기적인 제안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당장 서울 전구에 확산되고, 바로 전국적으로 건축종합민원 실을 설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제도도 몇 년이 지나자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운영되면서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일선 자치구에서만 17여년을 근무했다. 서울시로 들어온지 6년이 다되었다. 도시설계업무만 무려 6년여를 담당하면서 도시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게 되 었다. 건축과 도시, 도시환경과 경관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이 정립되는 것 같다.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말이다. 25살의 앳띤 총각이 나이 50을 바라보는 두 딸의 아비가 되어있는 지금까지 공무원 세계에서 보냈다는 것은 정말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이 뭐라하던 공무원, 그것도 말 많은 건축직 공무원을 선택한 나의 판단 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자부(?)를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