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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수양딸·수양아들을 두게 된 사연
     
   


●수양딸-후란

나의 사랑하는 딸 후란이가 2001.2 서울시립대학교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 진학을 한다.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

후란이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 몽골인이다. 나는 자식 욕심이 유난히도 많은 편이다. 그러나 막상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처음엔 나라와 보라, 두 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딸만 둔 나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시던 어머니에게 “잘 키운 딸 열 아들 안부럽게 키울테니 걱정말라”고 하면서 아내의 중절수술을 허락 받았던 나였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두 딸은 내 모든 것이다. 이 세상 어떤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하더라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런 나에게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새로 생긴 것이다. 아마, 자식 욕심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후한 선물을 주시는 것인가 보다.
시정개발연구원의 정석 박사는 아직 40대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둔 용감한 사람이다. 나에게는 그만한 용기(?)와 실력(?)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수고함을 덜어주시면서 두 자녀를 선물로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후란이를 만난 것은 인연이다. 인연이란 참 무서운 것인다.
공산국가였던 몽골이 1992년 민주화되고,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고, 서울시도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와 자매결연을 맺는다.
나는 울란바타르에 “서울의 거리”를 조성하기 위해 1996년 2월 공식방문을 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가로설계를 위해 4월에 또 한번의 방문을 하게 된다. 그 때 울란바타르의 부시장이었던 간바트라를 만나게 된다. 후란이는 간바트라의 딸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후란을 만난 적도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해 12월 그가 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된 것이었다. 아무 대책없이 서울시의 처분만 기다리면서 덜컥 서울로 오는 바람에 시 관계자는 매우 당황스러워 했다.
1996년 7월 “서울의 거리” 완성과 몽골의 최대 축제인 “나담축제”에 우리시 부시장(김의제)께서 참석하게 된다. 그 때 간바트라가 자신의 딸을 한국에 유학 보내기를 원했고, 부시장께서는 긍정적인 검토를 하겠다고 했었다.
그 약속만 믿고 사전에 확인 절차도 없이 덜렁 서울에 도착해 버린 것이었다.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없었던 관계로 담당자(국제교류과)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거처할 숙소도, 대학에 대한 준비도, 어느 것 하나 결정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사람만 도착해버렸으니 황당할 수밖에.
결국 그 담당자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며칠만 집에 데리고 있어 달라는 말만 믿고 허락했던 것이 인연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한국말을 떠듬거리는 정도였지만 의사 소통은 할 수 있었다. 바로 다음해 연세어학당에 입학하여 2달 동안 우리말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서울시립대학에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몽골의 경제사정은 우리나라의 50년대나 60년대 정도 수준이다. 그기서 아무리 부시장을 한다고 하지만 유학을 보낼 형편은 아니다. 몽골의 일반 노동자의 한달 노임이 30불에서 50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우리 글과 말을 겨우 익힌 주제에 어려운 한문투의 글을 이해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가정교사가 되어야 했다. 애처로운 마음에 그냥 버려둘 수가 없었다. 먼 나라에 혼자 와서, 말도 글도 서툰 그를 내 보낸다는 것이 마음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우리 집에는 딸만 셋이다. 아내도 딸이고, 딸도 딸이다. 어찌나 사랑 받기를 즐겨하는지, 잠시라도 무관심하면 야단이다. 그런데 새로운 식구에게만 관심을 주고 있었으니 그 질투가 어찌 했겠는가? “앞으로 나라와 보라가 외국에 간다면 이와 다르지 않을 텐데 관심을 갖도록 하자”고 설득해 보지만 머리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막상 가슴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은 것 같았다. 5개월을 함께 했다.

더 이상 데리고 있다간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에 가까이 있는 누나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였다. 아마 후란이는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보다는 믿을 수 있는 누나에게 보내는 것이 안심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누나 집에 있을 때에는 하숙비를 내도록 했다. 3개월이 지나서 다시 우리 집으로 오게 되고, 2학년이 되면서부터 시립대학교 부근의 하숙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아마 하숙으로 내 보낼 당시 후란이는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끈을 연결하고 있었다. ’98년도엔 아내와 함께 울란바타르의 후란이네 집을 일주일간 방문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 후란이 부모님도 서너 차례 우리 집을 다녀가는 등 인연이 계속되었다.

후란! 윤 후란! 그의 본래 이름은 「간바트라 훌란」이다. 그가 처음 우리나라에 왔을 때 부르기 쉬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后蘭」으로, 그는 우리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다. 나를 아빠, 아내를 엄마로 부른다.

아내는 후란이의 졸업장을 보더니 왜 성을 붙이지 않았느냐고 야단이다. 「후란」으로만 되어 있음을 보고, 앞으로는 「윤 후란」하라고 하였다. 아빠 엄마라고 부르면서 성을 따르지 않았음에 대한 아내의 서운함, 아마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후란이는 이제 서강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면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살 때 그는 자식들에게 한국에 있는 새로운 가족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그 때 그 자녀들이 한국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 수양아들-김창훈

나는 가끔 아내에게 농담을 하곤 했다. “아들이 밖에서 잘 자라고 있다. 언제 기회가 오면 데리고 오겠다”고. 아내는 코웃음을 친다. “당신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아내는 나의 능력을 익히 아는지라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성한 아들을 아내 앞에 데리고 왔다. 깜짝 놀랬겠지. 아마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을지도 모른다. 내심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이 양반 정말 따로 씨앗을 뿌렸단 말인가” 속으로 놀랬을 거다. 고소했다. 나를 무능력자로 보았겠다. 한번 혼나 보라고…….

창훈이가 그 놈이다. 김창훈! 2001년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박사과정에 다시 입학했다. 좀 느글거리면서 붙임성이 있어서 좋다. 착하다. 요즘처럼 힘든 세상에 제대로 살아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약간은 어리숙한 바보다. “사귀는 애인에게 차였다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울면서 새벽이 쫓아온 그다. 얼마나 순수한가. 달랬다. “너 같이 착한 놈을 차버린 그녀가 굴러 온 복을 차버린 것이니 아쉬워 할 것 없다”고.

창훈이는 서울산업대학교 편입 동기생이다. 부산 촌놈인데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갔다가 제대 후 바로 편입을 하였고, 나는 45세에 편입을 했는데 그 때 만났으니 우린 동기 동창인 셈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착한 심성에 반했다. 그놈이 1등을 하지 않으면 내가 1등을 했을 정도이니까 우린 경쟁자이기도 했다. 20대와 40대의 경쟁자. 이기고 지고 없이 서로가 좋아졌다. 가끔은 나이든 사람들의 컨닝 페이퍼도 준비해 주기도 했다. 그런 비밀스러운 관계가 우리를 더욱 가깝게 했는지도 모른다.

졸업을 앞둔 그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자문을 구해왔다. 앞으로는 고층·대형 건축물이 들어설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 보니 피난·방재·소방분야와 설비시스템 분야가 중요하게 대두될 것이라고 자문해 주었다. 남들이 하는 분야에서는 특출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으니, 가급적 미개척분야에 인생을 걸어 보도록 권했다.

그는 착하게도 내 말을 따라 주었다. 그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에, 나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에 진학을 하였다. 그는 피난방재 분야에, 나는 건축공학 분야의 공부를 하였다. 이제 창훈이는 논문을 마감하고 곧 졸업을 한다. 그리고 더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려고 한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자 하는 그 노력에 참으로 맘에 드는 놈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 창훈이도 나온다. 처음에는 모두들 내 사윗감으로 알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우리는 아빠·엄마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도 그를 아들로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