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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급적이면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혼자 기다릴 아내를 위하여, 가족과 떨어져 남편 하나 믿고 덜렁 따라 나선 아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나는 반드시 뭔가를 들고 퇴근했다.
붕어빵을 얼마나 사다 날랐는지 모른다. 양어장을 차릴 만큼 될 정도이다.
돈이 없을 때, 가난했을 때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었다.
이제는 둘 사이에 두 아이가 생기고 벌써 대학생이니 정말 오랫동안 질기게 살아왔다.
20년을 훨씬 넘었으니 어쩌면 신물 날 때도 되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신기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딸아이들이 결혼 기념일을 챙겨주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노래 불러 줄 정도가 되었으니 감회가 새롭다.
결혼할 때 무지무지하게 가난했다. 정말 형편무인지경이었다.
우리 부모가 가난했으니까 나도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번도, 그래 한번도 부모를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왜 이리 가난하게 날 태어나게 했느냐고 말이다.
물론 다소의 불편, 약간의 수치감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입으로 뱉어본 적은 없다. 내 운명이거니 하면서 말이다.
어릴 때는 그 가난이 즐거움이었던 때도 있었다.
군생활 중 만난 아내될 사람은 갓 취직되어 모아둔 돈도 없는데 나랑 결혼해야겠다고 했다.
고민스러웠었다. 어쩌겠는가. 서른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보기도 했는데 서른이 되면 뾰족한 수가 있을 리도 없고, 그래서 결혼을 해버렸다. 어떻게 되겠지하는 배짱으로, 무모하리만큼 용감했다. 그 당시에는.
아내는 그래도 좋아했다. 사랑 앞에 가난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70만원짜리 전세방에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방이래야 손바닥만하여 싸웠을 때도 따로 누울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우리는 싸움 같은 싸움을 해 본적이 없다.
신혼초에는 각방이 있는 집을 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 한 이불 덮고 잔다는 것은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한데, 조그만 다툼으로 각방을 사용하게 되면 화해할 타이밍을 놓치게 됨으로 이혼율이 높다.
단칸방 세대의 이혼율이 낮은 이유를 그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권하건데 가급적이면 단칸방으로 출발해라.
두 사람간에 충분한 이해가 될 때까지는 결코 방이 2이상인 곳으로 이사갈 생각을 하지 않기를 권한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 것 같은데 어쨋던 남의 귀한 셋째 딸을 아내로 데려다 놓고, 남들처럼 떳떳하게 호강 시켜주지 못하는 남편의 심정은 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가난이 이때 가장 불편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체면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하는 일이었다. 이해하는 일이었다. 투정을 받아주고, 위로해주고, 반찬솜씨 없음에도 탓 없이 먹어주고, 함께 시간을 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미안함을 해결할 수가 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은 오백원어치의 붕어빵이었다. 노릇노릇한, 고소한 붕어빵은 우리의 사랑의 매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아내는 그 붕어빵을 기다렸었다. 어느 날은 먹지 않고 버리는 때가 있어도 붕어빵을 기다렸다.
호주머니 사정이 나은 날이면 사정은 달라진다. 1000원으로 귤이나 바나나, 사과등 과일을 살 수 있었다. 아내는 사과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는데, 천원으로 살 수 있는 사과는 두 서너개가 고작이었다. 겨울은 눈이 오는 날이면 호빵 2개로 우리는 행복을 즐길 수 있었다.
아내는 입덧을 유달리 심하게 했었다. 특히 첫째를 가졌을 때는 아예 밥을 굶었다. 밥짓는 내음새를 견디지 못하여 나는 라면을 혼자 끓여먹은 적이 몇 날인지 모른다.
나는 지금 라면 끓이는데 일가견을 갖고 있다. 마늘 약간을 다져 넣는다던가 쇠고기를 조금 넣거나 파나 야채를 적당히 넣으면 전혀 다른 맛을 낸다. 그 때 혼자서 배운 솜씨다.
월급의 대부분은 과일 값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작은아이가 생겼을 때에도 붕어빵은 그치지 않았다. “띵똥” 벨 소리(우리 집 벨 소리가 띵똥이었다)에 꼬맹이들과 아내가 퇴근한 나를 맞이하면서 얼굴을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손부터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쩌다 빈손으로 들어가는 날이면 실망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붕어빵이, 호빵이, 과일 몇 개가 우리의 삶을 윤택해지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그 일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만큼 각박하게 삶이 진행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기분이 좋은 날이라던가 공돈(?)이라도 생기는 날이 아니면 사들고 가는 일이 많지 않았다. 아이도 크고, 생활에 다소 여유가 생겨서인지 과일을 박스채 들여다 놓고부터는 그 일이 끊겨버리고 말았다.
주는 기쁨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되돌아보면 생활도 다소 덤덤해진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근래에 순대나 만두를 사들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지하철을 내려 집으로 가는 중간에 오뎅과 순대를 파는 트럭을 지나게 되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옛날에는 꼬맹이 둘과 아내와 나 넷이서 먹었지만 이제는 아내와 나 둘만 먹는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성장한 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 놈은 교회생활에 바빠서, 막내는 지방대학의 기숙사에 있기 때문에 결국 두 사람만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아내는 몹시 허전해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엄마의 손길이 당장 필요없게 되었고, 나 또한 일에 파묻혀 매일 늦게 들어온다.
2월1일부터 시작한 100일 작정 새벽기도 때문에 나는 퇴근하자마자 잠자리에 든다. 이야기 나눌 새도 없이! 새벽 4시20분에 깨어서 대충 챙겨서 교회에 가고, 6시면 교회에서 바로 출근을 한다. 그리고 대충 저녁 8시나 9시 전후에 퇴근하게 되니까 아내와 이야기 나눌 틈이 없다.
그러니 아내는 더욱 외로울 수밖에 없다.
혼자 있는 아내는 번번이 굶는다. 혼자서 먹을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저께는 손이 튀틀린다고 했다. 나는 영양실조의 신호라고 나무라긴 했지만 죄스런 마음뿐이다.
결혼한지 23년!
나의 아내는 나와함께 드라마에 나오는 그럴싸한 레스토랑에 아직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가끔은 자기도 고상틱한 곳에서 공주처럼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데 막상 가자고 하면 순대국이나 쌈밥집이 고작이다. 아내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한다. 몇 년전인지 모른다. 시청 앞 프라자호텔의 커피숍에서 오렌지 쥬스를 시킨 적이 있었는데 아마 8천원쯤 했었던가 보다. 여기에 봉사료 10%와 세금 10%가 추가되었으니 아내는 놀랠 수밖에, 다시는 그런 곳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그 이후 아내는 돈이 들만한 곳은 가지 않았다.
그런 아내에게 작은 위안을 줄 수 있는 길이라면 순대가 문제이겠는가!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것을 나누고자 한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사랑은 서로간의 확인이다. 느낌이다. 눈빛이다. 마음이다.
5백원짜리 붕어빵이 2천원짜리 순대로 바뀐만큼 사랑도 더 깊어졌으면 한다.
나는 퇴근하는 지하철을 타면서 먼저 2천원을 따로 챙겨둔다. 순대를 사 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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