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건축문화의 해에 건축법·제도를 생각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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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한해가 될 것이다. 노스트라 다무스가 예언한 지구멸망의 해이며, 밀레니엄 버그를 해결해야 하는 해이며, 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해가 될 것이다. 천년을 마무리하면서 인간들이 저질러 온 잘못에 대한 후회와 미지(未知)에 대한 두려움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1999년은 건축계에서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다. 문화관광부가 「건축문화의 해」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건축은 단순한 기능이나 기술이 아니다. 세계 문화유산이 대부분 건축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보듯이 건축을 문화의 반열에 자리매김 한데서 누가 이의를 달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특정한 해를 「건축문화의 해」로 지정함에 건축인들의 입장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건축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하고 겸허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라는 사회적인 주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날의 건축물, 건축가들은 무엇인가?. 이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가? 이 부분에서는 많은 분들이 평할 것이기 때문에 필자는 건축행정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건축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 중 하나가 건축법이나 제도를 다루는 행정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를 담당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보다는 부끄러움뿐이다.
건축가는 건축가다웁게, 시공자는 시공자다웁게, 건축주는 건축주다웁게 바로 설 때 건축이 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건축이 부조리의 가장 앞자리에 오르내리는 오늘날의 부끄러운 건축풍토는 「다워야」 할 모든 사람이 「다웁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가 아니겠는가. 자질의 문제, 제도상의 문제, 환경의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문제되지 않는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쉬운 해결방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 탓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는가? 건축가와 건축시공자는 건축물을 직접 생산하는 책임자로서 그 경중(輕重)을 따질 수 없다. 물론 토지와 비용을 부담하는 건축주에 따라 건축물의 수준이나 품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건축주를 이해 설득시키는 책임은 건축가나 시공자의 몫이다. 여기에 건축법규나 제도가 건축물의 문화를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관과해서는 안된다.
브루노·타우트는 건축을 「균형(均衡)의 예술」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 때의 균형을 「아름다운 균형」,즉 기술·구조·기능과 더불어 자연으로부터의 조화(자연을 다듬거나 아니면 완전 자유화한 조화)를 이룬 개인과 사회에 대한 아름다운 균형을 갖춘 건축예술을 말하고 있다. 그는 「기술이 건축을 낳을 수 없다. 그러나 건축은 기술을 낳을 수 있다」고 하면서 「건축이 기술을 수단으로 삼게 되었을 때 감각적으로 더욱 명쾌·견고·우아함(明快·堅固·優雅)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기술과 구조는 기준과 법이라는 틀에서 많은 부분을 다루고 있다. 건축물의 기능은 건축가의 경험과 지식의 표현물로서 나타난다. 건축가 자신의 창작 아이디어의 외형적인 표현작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반드시 건축가의 의도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과 제도, 정책, 상황 등이 건축가의 창작자유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진흥법은 「우리 나라의 문화예술을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민족문화의 창달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공연법은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고 건전한 국민오락을 육성하기 위하여」, 영화진흥법은 「국민의 문화생활향상과 민족문화의 진흥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문화재보호법은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고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존재한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생각을 한번 바꾸어 보자. 세상이 달라지는지를 확인해 보자. 그저 건축주로부터 수주 받아 설계하고 시공하는 위치에서가 아니라, 설계하고 시공하는 그것이 새로운 건축을 창조하는 주체자로서의 생각으로 새롭게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수동적·피동적인 사고에서 적극적·능동적인 사고로 바꾸자. 건축이 문화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기에는 몇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 있는 건축가들의 정열도 중요하지만 숱한 무명작가들의 작품들이 곳곳에서 향기를 갖고 어울린 건축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명동을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그 분위기를 오래토록 기억할 것이다. 우선 스치는 사람들을 통해 싱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눈에 띄는 다양한 패션은 물론 쇼윈도우에 비친 페이버먼트와 발걸음, 이국적인 간판에서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살아있음을 맛 볼 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명동의 건축물 대다수가 무단 증·개축을 한 불법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철거와 고발, 재발생의 반복을 통해 현재의 명동이라는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건축법이 무시된 명동, 그렇다면 볼품없어야 하는 게 아닌가? 과연 명동이 볼품없는 거리이던가? 오히려 명동만이 갖는 그 무엇이 불법이라는 반역적인 행위가 있었음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만약에 제반 건축관계법 규정을 준수하여 건축된 명동이라면 과연 오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을까? 지역에 따라 특성에 따라 상황에 따라 건축법이 융통성 있게 운영되었다면 지금보다 더욱 세련된 명동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지역이 명동처럼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곳이 명동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회가 주어졌다. 과거가 어찌하였던 우리에게는 미래가 더 중요하다. 차거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건축이 이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반성해보고 건축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에 한번 아니면 우리 생애에 다시 이와 같은 기회가 주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시한부 인생이 주어졌다면 나머지 기간을 당신은 어떻게 사용하겠는가?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겠는가? 아니면 짧은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뭔가를 위해 마지막 불꽃을 사르겠는가? 산적(山積)한 일은 풀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건축인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건축가, 시공자, 건축주, 건축행정가 등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몫을 해결하는 일이 건축문화의 해를 맞이하는 건축인들의 자세가 아닐까?(9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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